백승종의 역사칼럼

백승종 역사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소리를 다시 주목해 본다. 알다시피 정약용은 퇴계 이황과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남인의 학맥을 계승한, 18~19세기 조선 최고의 학자였다. 그 정약용은 지식인이 나아갈 바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다산시문집>>, 제17권, <증언(贈言)>).

“공자의 도는 수기치인일 따름이다. 요즘 학문하는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는 것이 오직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것뿐이다. 또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수(數)와 태극원회(太極元會) 따위의 주장 따위이다. 나는 알지 못하겠거니와, 이런 것들이 ‘수기’에 해당하는가, ‘치인’에 해당하는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정약용은 18세기의 유식한 선비들이 매달리는 고급한 연구 주제들을 단숨에 폐기처분하였다. '유교적 학문의 본령은 ‘수기치인’이다. 그런데 이기설이니, 사단칠정론, 팔괘, 태극설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대강 이런 반론이 정약용의 관점이었다.

그는 ‘치인’, 즉 나라를 바로잡을 정치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결과적으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가 그의 붓끝에서 탄생하였다.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목민심서>>가 지방관의 행정실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경세유표>>는 국가조직 전반을 혁신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리고 <<흠흠신서>>는 형률(刑律)을 신중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저술되었다.

물론 정약용은 한 사람의 학자로서 ‘수기’, 즉 인격의 도야와 실천의 문제도 깊이 성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반산(盤山) 정수칠(丁修七)에게 주는 말>이란 한 편의 글이 유독 나의 관심을 끈다(<<다산시문집>>, 제17권).

“공자(孔子)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이것으로 덕을 이룸을 일러 인(仁)이라고 한다. 이를 헤아려 인을 구하면 서(恕)라고 말한다. 공자의 도는 이와 같을 뿐이다. 효(孝)에 바탕을 두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효를 확대해 나가면 어린이에게도 자애로울 수 있다. 제(悌)에 바탕을 두면 어른을 섬길 수 있다. 공자의 도란 세상 모든 사람을 저마다 효성스럽고 공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고, 어른을 어른답게 대접하면 천하가 다스려진다.”

정약용의 글은 뜻이 명쾌하다.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비는 ‘효제’ 하나만을 제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면 세상은 낙토(樂土)로 바뀔 수 있다. 공연히 어려운 말을 길게 부회(附會)할 이유가 없다. 정약용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보다 한 세대 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다산의 학문을 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김정희는 <실사구시론(實事求是論)>을 지었다. 그 글을 통해서 두 사람의 사상은 하나로 이어진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김정희도 정약용처럼 당대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일체 배격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가 쉬운 말로 가르친 것을 일부러 어려운 말을 동원해서 복잡하고 애매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김정희의 확신은 곧 정약용의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의 논의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근본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효한 점이 있다. 우리는 고상한 인격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요, 세상을 보다 바르고 진취적으로 뜯어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법정의도 필요하고, 국가제도도 혁신해야 하며, 행정도 크게 개선해야겠다. 그런 문제가 조금도 풀리지 않아서, 우리는 지금도 길거리에 나아가 윤석열 정권을 성토하는 것이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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