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광해군의 묘

조선 왕실의 무덤은 묻힌 이의 신분에 따라 능·원·묘 세 형태로 구분된다. 추존왕을 포함한 왕과 왕후의 무덤인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의 무덤인 원(園), 나머지 왕족과 폐왕의 무덤인 묘(墓)다. 27명의 조선 왕 중 반정으로 폐위돼 능이 아닌 묘에 잠든 두 사람이 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燕山君)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光海君)이다.
 

연산군, 생모 그리움에 폭정 치달아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1476년(성종 7) 계비 윤씨에게서 태어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1455~1482)는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이듬해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 후궁들을 투기한 죄로 1479년(성종 10) 폐출된 지 3년 후에 사사됐다.

생모가 폐위되자 원자였던 연산군은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그는 1483년(성종 14) 왕세자로 책봉되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그는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읽다가 윤기견이라는 낯선 이름을 발견하고, 혹시 다른 사람 이름을 잘못 쓴 게 아니냐고 승정원에 물었다. 승지들에게서 윤기견이 폐비 윤씨의 아버지며, 자신의 생모 윤씨가 폐위돼 죽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그날 그는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수라(水剌)를 걸렀다.

연산군묘 봉분[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연산군묘 봉분[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연산군은 재위 초기에는 선왕이 이룬 태평성대 분위기를 이어가며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선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와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를 거치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됐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 사초 중에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된 데서 비롯됐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의제)을 애도하는 글로,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을 빗댄 것이었다.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이를 사초에 기록한 김일손은 능지처사됐다. 이 밖에 많은 사림 학자들이 파당을 만들어 세조를 무고했다는 죄로 참형 당했다. 성종조부터 조정에 진출한 사림파는 무오사화 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게 화를 당했다. 이를 통해 연산군은 즉위 후 사사건건 자신을 견제하던 삼사(三司)를 무력화해 버렸다.

갑자사화 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여한 다수의 훈구 및 사림파들이 화를 입었다. 성종은 연산군이 원자 때 일어난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나 척신 임사홍이 사건 경위를 연산군에게 전했다. 그는 생모가 폐위되고 죽은 게 귀인 엄씨·정씨의 참소 때문이라 해 밤중에 대궐 뜰에서 이들을 때려죽였다. 이어 손에 검을 들고 계모 자순대비(정현왕후) 침전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쳤다. 뒤쫓아온 왕비 신씨가 극구 말린 덕분에 대비는 위기를 면했다. 다시 귀인 정씨의 두 아들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할머니 인수대비 침전으로 간 그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냐”며 난동을 부렸다. 

연산군은 과거 폐비 및 사사 논의에 참여했던 신하들을 능지처사 또는 참형으로 다스렸다. 이미 죽은 한명회,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했다. 권달수 등 폐비 추숭(追崇)에 반대한 신하들도 참형 등 중형(重刑)에 처했다. 이들의 가산을 몰수했고, 그 친족들도 연좌 처벌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형장을 때린 후 귀양 보냈다. 갑자사화는 죽은 생모를 위한 연산군의 복수극인 동시에 왕과 측근 세력이 권력 독점을 위해 벌인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 명나라에는 쉬쉬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심해졌다. 그는 유흥과 황음(荒淫)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재정은 파탄났고 양반 관료들의 반발도 커졌다. 민생을 외면하니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졌다. 결국 1506년(연산 12)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의 주도로 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세력은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정현왕후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새 왕(중종)으로 세웠다. 폐위된 왕은 연산군으로 강봉되면서 강화 교동에 유배됐다. 왕비 신씨도 폐하여 사저로 쫓아냈으며 폐세자, 창녕대군, 양평군, 이돈수 등 왕자들은 각지에 분산해 유배한 후 모두 사사했다. 연산군은 두 달 후인 11월 6일 유배지에서 31세의 나이로 역질에 걸려 죽었다. 중종은 연산군을 왕자군(王子君)의 예에 따라 장사 지내도록 했다.

반정 세력은 명 황제에게 왕의 퇴위와 승계에 대해 허락을 청하는 연산군 명의의 문서를 보냈다. 이때 연산군의 폐위 사실을 숨기고 ‘연산군이 병으로 왕위를 사퇴하고, 동생 진성군에게 왕위를 잇게 했으니 윤허해 달라’고 했다. 명 황제의 예상 질의에 대한 사신의 거짓 답변자료까지 준비했다. 

연산군묘[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연산군묘[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1537년(중종 32), 조정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연산군이 이미 죽은 사실을 이제라도 명나라에 알려야 하는지를 두고 의논했다. 1539년에도 명나라 사신이 폐왕의 거처를 물으면 어디에 있다고 답해야 할지 중종이 고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1545년 사신 당고(唐皐) 이후로는 명의 사신들이 더는 전왕의 안부를 묻지 않자 명종은 1562년 연산군 관련 답변자료를 삭제했다. 무려 56년간 연산군의 죽음을 감추고 거짓이 들통날까 걱정해야 했다.

연산군은 세자 때인 1487년(성종 18) 당시 병조판서였던 신승선의 딸이자 신수근의 누이동생과 혼인했다. 신씨(1476~1537)는 이듬해 왕세자빈에 책봉되고,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됐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함께 폐출돼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봉됐다. 그녀는 연산군이 유배 갈 때 울부짖으며 따라가려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를 남겼다. 신씨는 1537년(중종 32) 4월 8일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남편 곁에 묻혔다.

연산군묘 문석인[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연산군묘 문석인[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본래 연산군묘는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 있었다.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양주 해촌(海村, 현 도봉구 방학동)으로 묘를 이장하게 해달라고 청해 1513년(중종 8) 현재의 자리로 개장했다. 신씨가 남편의 묘를 이장한 곳은 그녀의 외가, 외조부 임영대군( 세종의 넷째 아들) 땅이었다. 신씨도 훗날 연산군묘 쪽 쌍분에 묻힌다. 

연산군묘 아래쪽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의 묘가 있다. 조씨는 태상왕(태종)의 빈으로 간택됐으나 가례를 올리지 못하고 태종이 죽어 빈 대신 궁주로 봉해졌다. 조씨가 후사 없이 죽자, 그녀의 제사를 모시도록 명을 받은 임영대군은 자기 땅인 이곳에 조씨의 묘를 썼다. 훗날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 난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그녀와 이혼했다가 재결합한 남편 능양위(綾陽尉) 구문경도 여기에 묻혔다.

 

서자 출신 광해군, 왕권 유지에 불안감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선조와 후궁 공빈(恭嬪) 김씨(1553~157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빈은 1572년(선조 5) 임해군을 낳았고, 1575년(선조 8)에는 광해군을 낳았다.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다. 공빈이 낳은 서장자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 선조의 눈 밖에 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위태로워지자 파천을 결심한 선조는 4월 29일 긴급히 광해군을 왕세자로 임시 책봉했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세자였다. 

광해군묘[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광해군묘[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선조는 6월 세자에게 병력 모집과 민심 위무를 위한 분조(分朝)를 명하는 한편, 요동 망명과 원병을 청하는 자문(咨文)을 명나라에 보냈다. 그러나 선조의 망명 시도는 명나라에 의해 거부됐다. 18살의 광해군은 나라를 버리려던 아버지 선조 대신 분조를 이끌며, 남도로 내려가 왜군과 대적했다. 정유재란 후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가 죽었고, 1602년 선조는 김제남의 딸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인목왕후는 정명공주(1603)와 영창대군(1606)을 낳았다. 선조는 적자인 영창대군으로 왕세자를 바꿀 뜻을 가졌지만 1608년 세상을 떠났고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즉위 후 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의 복구사업에 전념했다. 창덕궁을 비롯해 궁궐을 중건하고,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해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또 명나라와 후금(청) 사이에서 중립 외교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나 그는 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에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 제거에 나선다. 선조 말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던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미는 소북(小北) 간 갈등이 심각했던 터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집권한 대북은 1609년(광해 1) 임해군을 제거한 데 이어, 1613년(광해 5)에는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역모로 부풀려진 옥사로 인목대비(대비 당시 존호는 소성대비 昭聖大妃)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 후 부관참시됐고, 세 아들도 곤장을 맞고 숨졌다. 대비의 어머니 노씨는 제주로 유배됐다. 대북은 대비의 여덟 살짜리 아들 영창대군마저 역모 연루죄로 폐서해 강화에 유배했다. 그는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대북 세력은 계축옥사 직후 ‘대비를 폐출하고 죽이자’는 이른바 ‘폐모론’을 주장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다. 1618년(광해 10)에는 대비의 호칭을 ‘서궁(西宮)’으로 부르도록 했다. 서궁은 현재의 덕수궁이다. 왜란으로 불탄 창덕궁 대신 임시 궁궐로 쓰이면서 정릉 행궁으로 불렸다. 광해군이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창덕궁 서쪽에 있어 서궁으로도 불렸다. 대비는 죽음은 면했지만 후궁인 서궁으로 강봉된 채 어린 딸 정명공주와 함께 유폐됐다. 폐모론이 대두된 1613년부터 반정으로 유폐에서 풀려난 1623년까지 햇수로 11년 세월 식사도 문에 낸 구멍으로 받아야 했다. 

광해군묘 후면[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광해군묘 후면[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1623년 3월 13일 선조와 인빈(仁嬪) 김씨의 5남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인 능양군(綾陽君)이 서인(西人) 세력과 규합해 반정을 일으켰다. 광해군은 사다리를 타고 궁궐 밖으로 도망쳐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세자도 왕을 뒤쫓아 도망가다 민가에 숨었다. 유폐됐던 대비는 호칭을 되찾고 왕대비의 자리에 올랐다. 소성정의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교서를 내려 붙잡혀온 왕을 폐위해 광해군으로 강봉하고 세자를 폐서하는 한편, 능양군을 왕위(인조)에 올렸다.

왕대비가 교서에 밝힌 광해군의 핵심 죄목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 궁궐 건축 등 과도한 토목공사, 그리고 중국에 배은망덕한 외교정책이었다. ‘친히 광해군 부자의 목을 자르고 싶다’는 대비의 말은 자신을 유폐하고 아들과 친정아버지, 형제들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원한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택한 중립 외교를 신랄히 비난한 대목에서는 그녀가 대변했을 반정 세력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나 읽기가 민망하다.
 

인조반정으로 유배 후 제주에서 숨져   

광해군묘 문석인[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광해군묘 문석인[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광해군과 폐세자는 이후 강화에 유배됐다. 폐세자는 땅굴을 파고 도망치다가 붙잡히고, 폐세자빈은 목을 매 자결했다. 폐세자도 자결하라는 전지가 내려져 스스로 목을 맸다. 강화에 안치된 광해군은 정치 상황에 따라 강화(본섬)와 교동으로 유배지를 옮겨가며 지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인조 15) 제주로 옮겨진 광해군은 1641년 7월 1일 67세를 일기로 18년 유배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숨졌다. 인조는 그를 연산군 때처럼 왕자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 광해군은 10월 4일 경기도 양주 적성동(赤城洞) 현재의 자리(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부인 문성군부인 류씨 오른쪽에 묻힌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류씨(1576~1623)는 문양부원군 류자신의 딸로, 1587년(선조 20) 광해군과 혼인했다. 1592년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왕세자빈에 봉해졌고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돼 군부인으로 강봉됐으며, 광해군과 함께 강화에 안치됐다. 유배된 해 10월 8일 류씨는 병을 얻어 48세로 세상을 떠났고, 윤10월 29일 광해군보다 먼저 현재의 자리에 묻혔다.

광해군묘는, 형 임해군묘, 그리고 두 형제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와 같은 골짜기에 있다. 1577년 지금의 자리에 묻힌 공빈 김씨는 차남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1610년(광해 2)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면서 묘도 성릉(成陵)으로 추봉됐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녀도 공빈으로 다시 강봉되고 성릉도 성묘로 격하됐다. 광해군묘는 성묘에서 서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어머니 근처에 묻어달라는 광해군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고 전해진다. 성묘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는 인조반정 후 이곳으로 개장한 장남 임해군의 묘가 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인조 대에 편찬된 실록(일기)에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죄상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실록은 승자의 기록,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다. 패자는 변명할 수 없고, 죽은 이는 말이 없다. 반정을 합리화할 명분과 정통성을 부각시켜야 했던 이들로서는 쫓아낸 왕의 폭정과 패악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기술하고, 때로는 과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록 이면의 실제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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